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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여고생 실종 살인사건 사건

2018년 6월 16일 13시 30분경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17세(고1, 2002년생) 여고생 이 양이 집을 나선 뒤 실종되었습니다.
2018년 6월 25일 이 양으로 추정된 시신의 DNA가 이 양과 일치해 최종적으로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2018년 6월 16일 13시 30분, 이 양(17)이 집을 나선 것이 CCTV에 포착되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이 양은 SNS를 통해 '아버지 친구 김 씨가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다고 해 해남군 방면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8분 뒤 실종 학생이 약속 장소로 추정되는 공장 앞으로 가는 것도 CCTV에 찍혔다. 이에 김 씨도 13:50경에 가게를 나와 실종 학생이 향하던 공장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공장에는 CCTV가 없어 피해자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14:16에 김 씨의 차량이 이동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었으나 선팅이 너무 짙어서 실종 학생의 탑승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실종 학생은 실종 당일 15시경 수신된 친구의 문자도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실종 학생의 휴대전화는 도암면 야산에서 16시 24분에 전원이 꺼졌다고 한다. 한편 김 씨는 이 양의 집이 있는 성전면에서 도암면으로 20km 정도 이동한 뒤 도암면에서 2시간 30분을 머물렀다고 한다. 약 3시간 뒤 김 씨는 21시 20분에 자신의 차량을 몰고 군동면 인근 저수지로 간 뒤 21시 33분에 돌아온 것이 CCTV에 포착이 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김 씨의 휴대전화 위치 신호가 군동면 저수지에서 잡힌 것도 파악했다. 23일에 추가로 밝혀진 것은 이 양의 휴대전화 동선과 김 씨의 차량 동선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실종 당일, 이 양의 어머니는 딸이 실종되자 유력한 용의자인 아버지 친구라고 하는 김 씨의 집을 혼자 찾아갔다. 그러나 김 씨는 이 양의 어머니가 찾아온 것을 알고 뒷문을 통해 도망쳤다. 어머니는 17일 새벽에 경찰 측에 실종 신고를 하고 경찰이 김 씨의 소재파악에 나섰다. 김 씨는 17일 6시 20분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 근처 철도 공사장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유서나 타살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가 16일 17시 20분에 자신의 자택에서 본인 소유의 차량을 세차하고 옷가지를 불태운 정황을 파악하고경찰은 이 차량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김 씨의 시신도 부검해 사인을 찾아낸다고 한다. 이후 김 씨의 차량에서는 모발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김 씨와 이 양은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으며, 이 양도 김 씨의 가게(강진 시골보양탕)에서 일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병력 500명과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도암면 일대를 수색하였다. 20일 경찰은 이 양이 아버지 친구 김 씨를 만나기 하루 전에 "내일 아르바이트를 간다.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다."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 달라." 하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이 양의 친구로부터 확보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계획범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한다고 했다. 

또한 김 씨가 16일 밤에 저수지에 간 것을 파악하고 저수지도 잠수수색을 한다고 밝혔다. 23일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경찰 측은 덕서리로 수색 범위를 확대하고, 도암면 야산에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경찰이 아버지 친구라는 김 씨를 유력 용의자로 보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김 씨는 실종 일주일 전 이 양의 학교 근처에서 이 양을 우연히 만나 "아르바이트를 시켜주겠다." 하고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김 씨는 "알바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이 양은 친구에게 실종 하루 전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달라고 문자 메시지로 부탁했다.

둘째: 이 양의 어머니가 찾아오자 황급히 달아난 점이다. 지난 16일 오후 11시30분 즈음 집 초인종이 울리자 자기 가족들에게 "불을 켜지 마라고 말하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셋째: 김 씨가 자택에서 도망쳐 나온 뒤 다음 날 새벽 인근 공사장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점이다. 타살 흔적은 없었으며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넷째: 실종 당일 김 씨와 실종학생의 이동 동선이나 시간대가 비슷했다. 경찰은 실종 초기부터 김 씨의 차량 이동 경로와 이 양의 휴대전화 신호가 잡힌 지점들의 유사하단 사실에 주목했다.

다섯째: 이 양이 사라진 직후 귀가해 세차를 하고 옷가지로 추정되는 물건을 태우고, 사건 당일 자신의 휴대전화를 자신의 가게에 두고 간 점, 그리고 블랙박스를 끈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또한 김 씨의 첫째 아들이 말하길 김 씨는 생전에 자신과 차를 공유했는데, 아버지 김 씨는 평소 아들과 달리 차를 탈 때면 블랙박스를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의 차량에서 확보한 머리카락과 지문, 집에서 확보한 소각 흔적물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근처 주민들이 6년 전 이사와 거주했던 김 씨가 지난 4월부터 본인 소유의 축사, 주택, 산 등을 처분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씨는 4월 4일과 5일에 인터넷에 관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경찰은 김씨가 주거지를 옮기거나 큰 돈이 필요해 주택을 매매했을 것이라 보고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24일 15시경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이 휴대전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야산에서 발견됐다. 시신은 체취견이 찾아냈다. 시신 발견지역 시신은 매봉산이라 불리는 야산 근처에 세워진 피의자 차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속보에선 부패는 심하지 않았고 옷이 상당 부분 벗거져 있었으나 풀과 나뭇가지로 덮여있었다는 말이 나왔으나, 이후 열린 경찰 브리핑에선 이를 부정했다. 발견된 시신은 알몸이었고, 부패가 심해서 정밀 감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등은 발견하지 못했고, 시신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립글로즈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2018년 6월 25일 22시에 DNA 검사 결과 이 시신은 이 양임이 확인되었다.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추정 이유로는 시신 발견지점이 높고 가파른 산 속인데다가 피해자의 체중에 비해 김 씨의 체격이 왜소해서 혼자서는 시신을 옮기고 유기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 그 외에는 같은 무게라도 시신 상태일 때가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는 점 때문에 해당 지점까지는 여고생이 살아서 자신의 발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2018년 7월 6일, 강진경찰서 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양의 아버지 친구 김 씨가 이 양을 살인한 걸로 보고 김 씨를 피의자로 전환했다. 숨진 이 양 시신에서는 수면유도제인 '졸피뎀' 성분이 나왔다. 사건 이틀 전, 피의자 김 씨가 병원에서 같은 성분의 약을 처방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안산 인질극 사건 사건

2015년 1월 13일, 경기도 안산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인질극이 발생한 안산의 한 다세대 인질극 사건입니다.

2015년 1월 13일 오전 9시 36분경, 인질범 김상훈의 부인인 A씨로부터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는, 전 남편 B씨의 집에서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신고가 접수되면서 시작되었다. 경찰은 즉시 해당 지역에 출동하여 주변을 통제하면서 인질범과 협상을 벌였다. 사건 당시 김상훈은 흉기를 소지한 상태로 인질들을 억류했다. 사건 당시 김상훈과 A씨는 별거 상태로 알려졌다.

경찰과 대치하던 김상훈은 부인 A씨를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 A씨가 전화를 통해 인질극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였지만, 그는 A씨가 집안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면서 대치를 이어갔다.

5시간여 대치를 이어가던 중, 경찰특공대가 옥상에서 창문을 깨고 집안에 진입하여 김상훈을 제압, 생포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알려진 내용의 의하면 범행은 신고가 있기 전날부터 발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범인 김상훈이 범행장소에 침입한 시점이 1월 12일 저녁 무렵이라는 것. B씨는 12일 밤 이미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작은딸은 다음날 오전, A씨와 통화를 마치고 격분한 김상훈에 의해 큰딸이 보는 앞에서 흉기에 찔리고 목졸려 살해된다. B씨의 동거녀도 감금된 상태였다.

즉 신고가 제때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 피해자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경찰신고는 다음날 오전에야 전화통화를 한 A씨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결과, 범행동기는 부인 A씨와 연락이 닿지않아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 김상훈이 전남편인 B씨를 의심하고 그의 집에 침입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보고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냐는 질문을 던진 기자를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섭게 노려봤던 김상훈

인질극 범인의 이름은 김상훈이며 1월 15일,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으러 법원으로 향하던 도중 그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도 피해자이며 경찰이 지금 자기 말을 다 막고 있고 막내딸이 죽은 건 경찰 잘못이며 자긴 죽일 의도가 없었고애 엄마(부인)의 음모다. 철저한 수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둥 자신은 억울해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적반하장... 첫째 딸의 증언으로는 본인은 감옥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했다 한다.

조사 결과 밝혀진 바로는 전과 13범이었으며, 1999년부터 절도와 폭력, 상해, 음주운전 등으로 처벌을 받은 전력은 있지만 전부 집행유예와 벌금형에 그친 것으로 판결문에 명시되어 있다.

2년 전에도 아내의 막내딸을 상대로 성폭행까지 저질렀던 듯 하다. 범행 당시 13일 새벽에는, 인질로 잡은 큰 딸이 있는 자리에서 막내딸의 결박을 풀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한 뒤 성폭행까지 했다.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의처증이 심각한 상태에 범행후 궤변을 늘어놓는 등 소시오패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또한 막내딸에 대한 도착증 및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 보여 사이코패스까지도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프로파일러 면담과 사이코패스 검사 결과,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자로 추정한다고 한다. 처의 행동과 사고까지 통제하려는 망상적인 태도, 낮은 죄책감과 공감성 결여, 교활함과 범죄행위에 대한 합리화와 폭력성 등 반사회적 태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전에는 대구시 북구 자신의 집에서 지적장애가 있는 8살 딸을 두 차례 성폭행했다고 써 있었으나, 그 인물은 김상훈이 아니라 46세의 박모 씨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동일 인물인 것처럼 오보를 낸 MBN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해당 방송프로그램의 관계자에 대한 징계" 처분을 받았다.

경찰은 김상훈에게 인질살해, 특수강간, 감금, 폭행, 상해 등 10가지가 넘는 범죄 혐의를 적용하였으며 이에 따른 법정 최고형은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 내려질 수 있다.

김상훈이 과거 공사현장에서 인부로 일할 때 퇴근 후 동료들끼리 술자리에서 취중에 음담패설을 하면 김상훈은 술이 확 깰 정도로 기분이 나빠지는 불쾌한 음담패설을 늘어놔서 나중에는 술친구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결혼 전 A씨와 결혼하기 위해서 정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후 완전히 돌변했고 시도때도 없이 의심해댔다. 경제활동은 없었으며 보험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상태에서 A씨의 수익 또한 김상훈의 도박으로 날렸다.

부인인 A씨를 상대로 폭행의 수위는 상당히 높았는데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갈비뼈가 골절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인질극 일주일 전 김상훈이 자신과 만나주지 않으면 딸들을 죽이겠다는 말에 보복이 두려워서 만났다가 잠시 감금을 당했고 당시 칼에 의해 허벅지에 약 3cm 가량의 상처를 입었다. 그 뒤로 경찰에 찾아갔으나 현행범이 아닌 이상 손 쓸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A씨는 그 날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급하게 돈을 만들어 방을 얻으려 했었다. 먼저 두 딸을 피신시킨 후 본인 또한 피해있으려 준비 중이었고 딸들에게는 김상훈에게 혹여나 전화가 오거나 만나자거나 집에 찾아오면 112로 신고하라고 했는데 인질로 잡히던 날 저녁 마지막으로 만난 둘째 딸이 집에 도착하자 김상훈이 있었고 그 뒤로 이런 참극이 발생한 것이다...

김상훈은 1990년대 초반부터 피해자 A씨의 전 남편 B씨와 의형제를 맺는 등 나름 친밀하게 지냈고, A씨가 B씨와 이혼하자 A씨와 혼인을 하기도 했다. 김상훈은 2008년 3월, 내연녀를 만나오던 도중 A씨로부터 돈을 뜯어내려고 했지만, A씨가 김상훈의 내연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 하는 바람에 실패하자 마구 폭력을 행사하고 일본도를 휘둘러 머리카락을 베기도 했다.

또한 2012년 5월 자신의 집에서 의붓 막내딸 C양을 성폭행 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그해 10월 30일엔 A씨와 말다툼을 하던 중 A씨가 옷가지를 싸서 딸들과 함께 집을 나가자, 이들을 뒤쫓아간 김은 택시를 타려고 하는 A씨를 주먹으로 때리는 등 폭력을 행사해 자신의 집으로 끌고와 흉기로 협박했다.

인질극 일주일 전인 2015년 1월 7일 오전 12시 30분경, 상록구의 모 카페에서 김상훈은 별거 중이던 A씨를 위협해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집으로 끌고가 일본도 칼집으로 때리고 "다 죽이는 데 1분이 걸리겠나? 몇 초면 된다"며 같은 날 오후 5시 30분까지 감금했다.

김상훈은 A씨를 협박해 자신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A씨가 전화를 받지 않고 1월 12일경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이혼하자"라는 취지의 문자를 받게되자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격분하면서 인질극이 시작되었다.

1월 12일 오후 4시경, 김상훈은 부엌칼을 들고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B씨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엔 B씨의 동거녀(31세)가 있었다. 김은 B씨의 동거녀에게 "B의 후배인데 물건만 놓고 가겠으니 열어 달라"고 유도하여 집안으로 들어왔다. 의도대로 집 안에 들어온 김상훈은 칼로 위협해 결박한 뒤 작은 방에 가둬두었다.

같은 날 10시경, B씨가 귀가하자 김상훈은 그를 집 안쪽으로 유인해 제압하려고 했다. 이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B씨가 "밖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김은 B씨를 붙잡고 얼굴과 목 등의 부위를 10여차례에 걸쳐 찔러 살해했다. 시신은 화장실로 끌고가 숨겼다.

이후 A씨의 막내딸 C양(16세)과 D양(17세)이 귀가하자 차례로 제압해 작은 방에 가둬두었다. 그 뒤 언론에서 보도된 것과 같이 김상훈은 C양을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하고, 13일 오전 9시에 A씨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집으로 와서 네 잘못을 빌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통화 과정에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음을 알게 되자 김상훈은 보복으로 칼로 C양을 찌르고 코와 입을 눌러 막아 살해했다.

2015년 1월 19일 오전, 경찰은 비공개로 현장검증을 진행했는데, 피해자 가족 중에 하나인 A씨의 아들(21)이 "김상훈 이 개새끼야"라고 하자, 범인 김상훈은 "네 엄마 데려와!"라고 되레 호통을 치며 뻔뻔함도 보였다.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저런 죽일놈" "사형시켜라" 등의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고함을 치기 이전에는 활짝 웃고있어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같은 방 수감자들에게 피해자 아들을 두고 " 그 새끼 분해서 개거품 물더라. 눈앞에 내가 있는데도 손가락도 못 대고 욕만 하니 미치려고 하더라고 " 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ㅡ..ㅡ^

인질로 잡혔던 인원은 A씨의 전 남편 B씨, A씨와 B씨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 B씨의 동거녀로 알려진 30대 여성 등 총 4명이다.

이 중 전 남편 B씨는 인질극이 시작되기 전날 이미 살해된 것으로 파악되었고, 막내 딸은 다음날 경찰 신고가 접수되고 A씨와 통화가 연결된 이후 격분한 상태에서 살해당했다. 나머지 큰 딸과 30대 여성은 무사하다고 한다. 다만 생존자 2명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인질범의 부인 A씨 역시 정신적 충격이 심해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특히 큰 딸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생이 칼에 찔리는 현장을 목격했고, 동생의 시신이 방치된 방안에서 5시간여 동안 그 자신도 김씨에 의해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가장 심한 상태이다.

A씨의 전 남편인 B씨는 사망한 지 하루 정도 지난 상태로 보인다고 경찰측이 밝혔다. B씨의 경우 목에 수차례 흉기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국과수의 부검 소견으로 전 남편 B씨는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작은 딸은 목졸림에 의한 질식이 사인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부검 결과, 작은 딸의 몸 속에서 김씨의 체액이 검출됨에 따라 경찰은 김씨가 성폭행을 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2015년 3월 10일 진행된 1차 공판에서, 김상훈측은 범행전 아내의 허벅지를 일본도로 찌른것은 의도된 범행이 아니라 실수였다고 주장하였고, 작은딸을 강간한 혐의에 대해서는 강간이 아니라 합의하에 이뤄진 성행위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물론 거짓말. 재판부는 방청하고 있던 유족에게 발언권을 줬는데 이자리에서 유족측은 "그냥 사형시켜 달라. 저 인간은 사람도 아니다. 반성도 모른다"고 호소했다.

2015년 8월 21일, 1심 재판부는 김상훈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피살자가 2명에 그친 점.2명이라서 다행이라는건가? 순순히 모든 범행을 인정하고 자수한 점. 아내의 이혼통보로 인한 분노 때문에 저지른 범행이라는 점이 참작됐다고 한다. 김상훈은 무기징역을 받은 뒤 바로 항소 의사를 밝히지 않고 침묵했으나 검찰이 사형을 요구하며 항소하자 뒤따라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다. 따라서 2심에서 그의 양형을 다시 결정하게 된다. 사실 대다수의 법조계 관계자들은 사형이 선고될 것으로 전망했을 정도로 죄질이 나쁜 사건이었다고 한다.

2016년 1월 29일, 2심 재판에서도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김상훈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점,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이혼 통보를 받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점, 피살자가 2명에 그친 점, 재판 과정에서 반성하고 사죄하며 지낼 것을 다짐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2016년 5월 9일, 대법원 2부는 (주심 김창석 대법관) 김상훈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사건 초기 언론에서 인질과 대치중이던 경찰의 미흡한 대처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경찰특공대가 동원되고서도 2시간 정도 지난 후에 작전이 진행되어 막내딸의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주된 비판의 논지였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이런 여론을 유도하고 부추긴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미 범행은 신고 전날(1월 12일) 저녁부터 발생했었고, B씨의 동거녀에게 B씨의 동생이라고 속이며 집에 출입한 뒤 주방에 흉기를 뽑아서 B씨의 동거녀를 작은 방에 가두고 전 남편인 B씨가 집에오자 살해했고, 막내 딸은 A씨와의 전화로 다툼이 있은 직후인 다음날 오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미처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A씨와 통화를 한 직후 격분한 김씨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즉 경찰의 대응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질극 자체가 알려진 시점이 너무 늦어버려서 경찰로서도 그 상황에서 더이상 남아있는 인질들의 희생을 막는데 초점을 맞출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언론의 초기 보도로 인해 애꿎은 경찰이 비난을 받은 사례가 되었다. 그럼에도 시정하지 않고 여전히 여론을 몰아가는듯한 어조로 작성되고 있는 몇몇 기사들은 그야말로 밑바닥까지 까이는 중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월 8일, A씨는 김상훈에게 흉기에 찔린 이후, 안산상록경찰서를 찾아가 범인 김상훈에 대해 긴급체포나 접근금지가 가능한지 여부를 상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담원은 고소장을 제출하라고 안내만 했을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아 A씨는 그냥 되돌아왔다고 한다. A씨 지인의 말에 따르면 김상훈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은 A씨가 지난 12일 두 딸을 불러 여관에 머무르다 전 남편의 집에 가다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범인 김상훈이 A씨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음에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건 어떤 비판을 받아도 싸다. 충분히 범행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방관한 꼴이다...

서천 카센터 살인사건 사건

서천 카센터 살인사건입니다.

2004년 5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Y카센터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방화사건입니다.

서천읍내에는 망순 5개의 가게가 하나의 큰 건물에 일렬로 모여 있는 상가가 있었다. 2004년 5월 2일 자정을 넘긴 시간, 여기서 농기계 가게를 운영하던 여주인 42살 김 모(A)씨는, 바로 같은 건물의 끝부분에 있던 카센터 여주인 43살 김 모(B)씨 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김 씨(A)는 전화를 받은 후, 그 늦은 시간에 외출 준비를 하고서 집을 나섰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외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아들 17살 최 모군이 어디 가냐고 묻자, 김 씨(A)는 "카센터 사장이 낚시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카센터 여주인과 같이 병원에 가려고 한다" 라고 말했다. 최 군은 카센터로 가는 어머니를 문 앞까지 나가서 배웅하면서 보니, 카센터 앞에는 낯선 방문객 몇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은 카센터로 어머니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집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거의 3시간이 지난 오전 2시 36분경, 최 군은 어디선가 폭죽 소리 같은 게 나자 창을 열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 다시 창을 닫았다가, 천장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불이 난 것을 알게 되었다. 급히 아버지와 동생들을 깨워 집 밖에 나가 보니, 카센터 쪽에서 시작된 불길이 상가 전체로 빠른 속도로 번져 가고 있었다. 불은 상가 전체를 깡그리 태우고 오전 3시 반이 나서야 진화되었다. 목격자는, 잠을 자고 있는데 '펑' 소리가 카센터 건물에서 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불이 꺼진 뒤, 소방관들은 불이 시작된 카센터를 수색했고, 불탄 카센터 안에서 성인 여성 한 명과 아이 두 명의 불탄 시신을 수습했다.

처음에는 세 구의 시신이 카센터 주인의 부인 김 씨(B)와 자녀인 8살 쌍둥이 남매의 시신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농기계 가게 주인, 즉 김 씨(A)의 남편 최 모 씨는 교통사고를 당했다던 카센터 주인 45살 김 모(C)씨가 버젓이 멀쩡하게 나타나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분명 그의 부인은 카센터 사장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는데... 카센터 주인 김 씨(C)는 사건 전날인 5월 1일 오후 8시30분경 낚시하러 떠났고, 사건 당일에도 계속 낚시를 했지만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았으며, 오전 3시경 ‘가게에 불이 나 아이들이 숨졌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을 때까지, 아내 김 모(B)씨 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농기계 가게 주인 최 씨는, 불탄 성인 여성의 시신이 자신의 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경찰에 이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경찰은 김 씨의 아들인 최 군의 혈액을 채취해, 국과수에 DNA 감식을 의뢰한 결과, 불탄 성인 여성의 시신은 정말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로 드러났다.

그날 오후 2시 30분경, 카센터에서 10㎞ 가량 떨어진 서천군 마산면 이사리 봉선저수지 주변에서, 마을 주민에 의해 피 묻은 여성용 점퍼와, 목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트레이닝복 상의가 발견되었다. 경찰이 농기계 가게 주인 최 씨와 카센터 주인 김 씨(C)에게 확인한 결과, 옷의 주인은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일대를 수색했으나, 김 씨(B)의 시신을 찾을 수 없다가 8일 후인 5월 10일 오전 8시 55분경, 카센터에서 4㎞ 가량 떨어진 서천군 시초면 용곡리 교각공사 현장 대형 수로관에서,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의 시신이 현장 인부에 의해 발견됐다. 김 씨(B)의 시신은 신발과 바지가 벗겨진 채, 머리와 팔이 수로 입구에 걸쳐져 있었고, 하반신은 물에 잠겨 있었다. 목 주위에는 흉기에 찔린 듯한 상처가 있었다. 경찰은 검안 결과 김 씨(B)의 목 주위에서 흉기에 찔린 듯한 상처가 발견됨에 따라 현장 주변을 수색했으나, 물속에서 김 씨(B)의 바지만 발견했을 뿐,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는 찾지 못했다. 거기다 이미 물속에서 부패된 상황이라 정확한 사망 시각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 씨(B)는 발견된 옷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목 부분이 예리한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7월 13일, 경찰은 카센터 사건 현장을 조사하다가 남성용 허리띠 버클을 발견했다. 버클은 무궁화 속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으며, 카센터 바닥에서 발견했다. 확인 결과, 이 버클은 농기계 가게 주인이나 카센터 주인의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차고 있던 허리띠에서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카센터 여주인이나, 농기계 가게 여주인과 실랑이를 벌인 의문의 남성의 허리띠에서 버클이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아니고, 단체나 기관에서 주문제작한 버클인 것 같다고 한다. 경찰은 발견된 버클을 제작한 업체를 대상으로 수사를 벌였으나, 이 버클이 7∼8년 전 단종된 제품이어서 제조사나 유통망 등 출처를 알 수는 없었다.

최초 발화점이자 시신이 발견된 카센터는 근방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카센터였다고 하며, 세차까지 해주는 등 성실한 집이었으니, 못해도 월 500정도는 벌지 않았겠느냐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카센터 여주인 남편 김 씨(C) 또한 통장에 '1억 5천은 갖고 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이후 통장을 보니 돈은 얼마 없었는데, 4년 간 카센터 여주인 김 씨(B)가 교회에 바친 헌금액이 3,300만원이었다고 한다... 웬만한 중형차 한대 값임을 생각해 보면, 살해된 여주인이 교회에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사건 직전에 카센터 부부는 집기를 때려 부수고, 홧김에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로 심한 다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 초기, 특히 방화 8일 후 카센터 여주인이 살해당한 것이 발견되었을 때, 마을에서 '이 사건은 남편이 저지른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비록 남편은 화재 당시 낚시터에 있었다는 목격자까지 나왔으니 알리바이는 확실하지만, 청부살인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는 남편에 대한 그 어떤 혐의점도 찾을 수 없었으며, 남편도 방송에 나와서까지 이런 소문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는 서천군의 중심지이지만, 서천군은 인구 6만여 명의 조용한 작은 시골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작은 시골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금방 범인이 잡힐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사건은 2018년 현재까지도 미궁에 빠진 상황이다...

우선 가장 큰 의혹은, 과연 한밤중에 카센터를 방문했던 의문의 방문객들은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이들이 범행과 무관하다면, 사건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방문객이라고 나서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날 한밤중에 카센터를 방문했다고 경찰에 제보한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들 중에 범인이 있거나, 이들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사건 당시, 카센터 옆 카오디오 가게에 있던 가게 주인 송 모 씨와 그의 동생은, 카센터에 누군가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으며, 어머니 김 씨(A)가 카센터까지 가는 걸 지켜 본 농기계 가게 주인 최 씨의 아들도, 카센터 앞에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일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남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며 그만큼 민폐이다. 따라서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에게 그들의 입장에서는 뭔가 매우 중대하거나 시급한 일을 따지거나 추궁하기 위해서 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당시 집에 카센터 주인 김 씨(C)가 낚시를 가고 없는 틈을 타서 카센터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다. 또한 이들이 처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들이 카센터 여주인 김 씨(B)를 죽일 목적으로 왔다면 떼로 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까지 카센터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자신들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와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를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카센터에 돌아와서 불을 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후에 최면을 통해, 농기계 가게 주인의 아들 최 군은, 방문객들이 네댓 명이었고 4~50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으며,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었다고 진술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정장 차림을 하고 4~50대의 남녀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으로 볼 때, 전문가들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라기 보다는 종교 관계로 아는 자들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했다. 실제로 죽은 카센터 여주인 김 씨(B)가 4년 간 교회에 바친 헌금액이 3,300만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300만원이 웬만한 중형차 한대 값임을 생각해 보면, 살해된 카센터 여주인이 교회에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 모두 사생활이 깨끗했고 집과 가게, 교회만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게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다.

김 씨는 자정이 넘어서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의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카센터 주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는데, 왜 이런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그녀 또한 카센터 여주인과 그녀를 찾아온 방문객들의 일에 어느 정도 개입이 되어 있었고 의문의 방문객들이 카센터 여주인은 물론, 농기계 가게 여주인도 만나기 위해서 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남들이 알아서는 곤란한 일이었기에, 그런 거짓말을 하고 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이 카센터 여주인의 시체가 발견된 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발견된 의문의 편지다. 범인(혹은 범인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에서 범인은 사건과 별로 연관이 없을 것 같아 보였던 농기계 주인에게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 이유를 뒤집어 씌우려는 늬앙스를 담고있다.

물론 농기계 가게 주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카센터 가게 여주인이 농기계 가게 주인에게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거짓 정보로 유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카센터 여주인의 시신이 발견된 지 불과 4시간 뒤, 한 모텔 우편물 반송함에서 의문스러운 내용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기자와 서천경찰서 형사과장 앞으로 각각 보낸 것이었다. (맞춤법과 문법 등이 이상하지만, 당시의 편지 내용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긴 것이다.)

카센터 화재사건은
농기계 여자의 죄의식에서이고
두 여자 사이에서 사랑을 한
저에 잘못입니다
제차에서 두여자가 싸우다 그만
화재는 농기계 여자가 죄의식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시신을 날라준 죄밖에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훗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외국으로 갑니다
저는 이 글이 도착할 때면 외국에 있을겁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시체는 개천에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필적을 감추기 위해 왼손으로 쓰인 듯한 이 편지의 내용은, 카센터의 화재는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의 죄책감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이며, 사건의 원인은 카센터 여주인 김 씨(B)와 농기계 가게 여주인 김 씨(A)가 자신을 두고 사랑을 한 것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더불어 자신은 시신을 나른 죄밖에 없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피해자 주변의 증언으로 볼 때, 이 편지의 내용은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만, 신빙성이 없는 편지 자체가 범인의 정체를 파악할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편지를 쓴 목적은 상당히 용의주도한 것으로, 은연중에 사건 수사의 방향에 혼선을 주기 위해, 사건이 마치 치정 싸움으로 벌어진 것인 것처럼 몰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100% 장난이나 거짓말은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사실이 섞여 있다. 무엇보다 시체는 개천에 있다고 한 부분은 확실히 입증된 사실이다.

물론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을 정도의 사실만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지는 묘하게도 농기계 가게 여주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카센터의 화재는 농기계 가게 여주인의 죄책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이면에는 이 범인의 심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범인이 말하려는 건, 농기계 여주인이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라는 것일까? 그저 범죄를 저지르고 들키는게 두려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벗어나려는 심리일수도 있다.

또한 편지에 주목할 점이 또 있는데, '형사과장'이라는 말에 있다. 당시 서천경찰서 같은 경우는 3급지 경찰서이기 때문에 형사과장이 없고 수사과장이 지휘 통솔하는 시스템이었다. 형사과장이란 직책이 있는 곳은 대도시 경찰서나 1급지 경찰서에만 존재한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은 대도시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과자일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사건 이후, 화재 1시간 전쯤 카센터 앞에 낯선 사람을 봤다”고 진술한 농기계수리점 아들과 자동차오디오 가게 주인 등의 진술을 토대로 최면 수사까지 동원해, 카센터를 방문한 의문의 방문객 중 남자 1명과 여자 1명의 몽타주를 작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몽타주가 나왔음에도, 여전히 의문의 방문객들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몽타주 속 인물들은 인근 가게 주인과 비슷해 보였고, 목격자 등에 대해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실시했지만 모두 진실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목격자의 기억이 정확한 게 아니어서 당시 현장에서 목격된 낯선 이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기도 어렵다고 볼 정도...

다행히 편지에서는 3점의 지문이 나왔다. 1점은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의 것이었고, 2점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쪽지문이었다. 경찰은 주기적으로 국과수에 해당 쪽지문에 대한 조회를 의뢰하였으나 아직까지 일치하는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카센터 여주인의 옷이 발견된 장소 등이 서천지역 지리를 잘 알지 못하면 찾아가기 힘든 장소였다는 점에서 범인이 서천지역 지리를 잘 아는 인물일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2009년, 희대의 여성 연쇄 성폭행 살인범인 강호순이 검거되면서, 사건 수사에 다시 활기가 띄었다. 하필이면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 강호순이 서천군의 어머니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도 강호순이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범행 수법이 강호순과는 차이가 있었고, 사건 당시 알리바이도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조사결과 이 사건은 강호순과는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살해 이후 불이 났다든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두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지만 증거는 부족하다. 동일범일 소행도 있겠지만, 4년간의 시차가 있고, 범행수법이나 사건내용 같은 게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므로 모방범죄일 가능성도 많다.

지존파 살인사건 사건

최악의 살인사건 지존파 살인사건 입니다.
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마스칸.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지어준 이름이다.'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훈련을 할 때 이마에 지존(至尊)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고반장이 조직원들과 합의 하에 지었다. 게다가 두목인 김기환의 별명 역시 '지존'이었다.

일반적으로 연쇄 살인자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두 명 이상이 개입된다고 해도 서로 부부나 연인, 혈연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해 약간의 인연만 있던 타인들이 오직 살인을 위해서, 그것도 6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한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이들이 준 충격은 가히 엄청났으며 천하의 공영방송 앵커들조차 이들의 범죄를 전하면서 말을 더듬으며 차마 전할 수 없다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였다. 범죄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필 사건이 공개된 시기가 추석 연휴여서 그 충격은 더 컸다. 지금이야 그보다 더한 흉악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세상 어디서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범죄였기에 당시엔 임팩트가 상당히 강했고, 2010년대 기준으로 다시 봐도 발상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인 범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최악의 범죄 살인사건을 꼽으라면 종종 거론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범행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돌렸는데, 개인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복성 살인이라는 것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후에 아류(亞流)인 막가파, 영웅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행동강령도 있었는데 이 내용을 보자면 더욱 답이 없다.

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배신자는 죽인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지존파의 결성 계기는 대학입시부정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허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다.

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조직을 조직할 계획을 세울 결심을 하고, 탄광 일을 할 때 알게 된 조 모 씨에게 살인을 제외한 범죄 계획을 알려주며 설득에 나섰다. 평소 조 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적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설득에 성공했고, 조 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세 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다.

1차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 이주현 씨의 소개로 '가희산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과 접촉해 그들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다.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다.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강동은의 교도소 동기인 문상록, 후배 송봉은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김기환 외 세 명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렸고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병옥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다. 이주현 씨는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토록 했다.

이렇게 조직은 그해 7월, 포커판에서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은을 축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이미 한 번의 실패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놓고 잘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후에 김기환의 수감 후 부두목이 된 강동은이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애인이자 영광의 J주점 종업원 이경숙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지 이틀만에 전원 검거되어, 그녀는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

범행 당시 나이 26세.

3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 당시 겨우 아홉 살이던 누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출부 일을 시작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어릴 적엔 자신은 학교에서 밥을 먹고 왔다며 형제들에게 음식을 양보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을 해본 경험도 있었으며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엔 '지도력이 강하고 급우를 잘 통솔하며 간섭이 좀 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범생이었지만 가난으로 인한 상처를 심하게 받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어서 안 가져 갔더니 선생님이 ‘그러면 친구들 것을 뺏어서라도 가져왔어야지!’라고 혼냈다. 그래서 친구들의 준비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았다. 난 선생님이 가르친대로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어머 선생님 나쁘네라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운동능력과 글짓기 실력도 우수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후술할 내용에도 나와있다시피 다른 조직원들보다 지능적로도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덕분에 집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활기록부 상에 준법 정신이 낮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형마저 병에 걸리자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으로 내려간 후 가장 먼저 취직한 곳은 한 신발공장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어머니께 보냈고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도 했다. 그 후 몇 년 간 대한석탄공사에서 잡부 일을 하거나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나름 성실히 일했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검정고시 준비도 그만두고 후엔 직장도 그만둔 뒤 전라도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시 가족들과 지냈다. 그 와중에 도박에 빠져 도박으로 인한 빚도 지게 되었다. 포커를 잘 해서 ‘지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지존이란 별명은 조직 결성 후 부하 조직원들에 의해 ‘두목’을 대신하는 칭호로 쓰이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돈이 필요했던 김기환은 ‘가진 자들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살해하는 조직 결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고, 조직 결성을 위해 각종 범죄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처세, 대화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첫 조직 결성은 실패하고 고향 후배 강동은 등을 끌어들여 현재 잘 알려진 멤버들로 지존파를 결성하여 두목이 된다.

조직 결성 후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일주일 간 물 한 병과 칼 한 자루로 버티도록 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과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집을 살인 아지트로 개조한다. 평소엔 동네 형처럼 조직원을 대했지만 강압적인 리더십으로 조직원들을 복종케 했으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첫번째 피해자인 최미자 씨와 송봉은 살해를 주도한다. 실제로 조직원들은 송봉은 살해 당시 두목인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잔혹하게 살인 행위를 했다고 한다.

아지트 완공을 얼마 앞두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인 1994년 6월 17일 김현양의 생일날, 조직원들과 술을 마신 후 밤에 불현듯 자리를 비워 선배의 집에서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갔다가 자고 있던 선배의 중학교 1학년 조카를 강간해 체포된다. 이때 김기환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전문가들은 김기환이 직접적인 범행으로부터 손을 떼고 중죄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강간치상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김기환은 수감된 후에도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임명해 부하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지시했다. 수감되어 있는 중에도 그의 말은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법이었다.

후에 지존파 전원이 검거되어 서울구치소로 이전된 뒤 1995년에 사형이 확정된다. 사형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야!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여? 이건 세상 법이 X같은 것이여!"라는 말을 남겼다.

지존파 부두목 강동은

검거 당시 나이 21세, 고등학교를 중퇴 했고 특수절도, 폭력전과 2범이다. 김기환의 국민학교, 중학교 후배였다. 다른 조직원들과는 달리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고 형제가 많아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어 급우들을 자주 폭행했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생활기록부 상에는 '매사에 무관심한 성향', '바른 생활이 요구됨'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동창인 문상록과 함께 이웃집의 벼 두 가마니를 훔쳤다가 절도 전과를 갖게 된다. 밴드부에 가입해 음악에 취미를 붙여보려고도 했으나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심해 그만두었다. 그 후 방황하다가 결국 문상록과 가출해 상경한 후 막노동을 시작했다. 전과삭제를 위해 4년 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 1500만원을 변호사에게 주었다가 돈만 날렸을 뿐 여의치 않자 그 때부터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고,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지가 않자 귀향해 도박에 빠졌다가 김기환을 만나 조직에 합류하게 된다. 김기환에게 충성을 보이며 문상록, 백병옥, 강문섭 등을 소개시키는 등 초반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두목인 김기환이 강간치상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부두목으로 임명되어 수감 중인 김기환을 수 차례 면회해 범행 지시를 받았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었고 조직의 부두목이 되기도 하는 등 겉보기엔 범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소심해 거의 김기환으로부터 범행을 지시받아 나머지 조직원들이 실행하도록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범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첫 피해자였던 최미자 씨 살해 후엔 죄책감에 시달려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혼자 지내기도 했고 소윤오 씨 부부 살해 당시에도 지시만 하고 가담하지 않았다.

지존파가 체포되기 며칠 전 잡일과 요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명목으로 자신의 여자친구 이경숙이 일하던 주점에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이경숙을 지존파의 일원으로 들인다. 그렇게 이경숙이 조직에 합류한지 이틀 째 되던 날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트럭을 타고 아지트를 나섰다가 미행하고 있던 경찰과 1.5km 추격전을 벌인 후 조직원들 중 제일 먼저 체포되었다.

지존파 행동대장 김현양

검거 당시 나이 22세, 중학교 2학년을 중퇴 했고 상해전과 1범이다. 김기환과 조직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인물이다. 상해 1범이라는 전과도 조직 가담 후에 생긴 전과다.

검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던 남동생과 미성년자던 여동생이 있었으며 12세에 중국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사망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치하고 식당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낯선 남자들이나 아버지의 친구들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하교 후 귀가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로 심리적인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달사항에는 '무기력하며 학업에 관심이 없음', '주의가 산만하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현양의 학창시절 담임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김현양에 대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창시절엔 심리적인 방황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보이지 않았고 큰 문제도 없어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한다. 이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은 커져갔고 이는 일종의 여성혐오로 변모하게 되었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다툰 후 가출하여 광주로 올라갔는데 첫날부터 걸인들에게 잘못 걸려 앵벌이를 하게 된다. 껌팔이, 절도 등을 하며 도주할 기회만 엿보다 도주에 성공해 서울로 상경한 뒤, 신문팔이부터 시작해서 지역을 옮겨다니며 정착하지 못한 채 제화점 직공, 술집 웨이터 등을 전전한다. 그러던 중 전기기술을 배워 취직해 몆 년 간 모은 돈으로 트럭을 구입해 굴비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한다. 장사를 접고 운수회사에 취직했지만 취직한지 얼마 안 되어 이주현 씨로부터 김기환을 소개받고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조직에 합류한 뒤 그간 내재돼있던 높은 폭력성을 보이며 두목인 김기환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행동대장답게 모든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체포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웃어보이며 당당하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오히려 두목인 김기환보다 언론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지존파 조직원들 중 얼굴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지존파 조직원 중 유일하게 인육을 먹었다고 발언해 모두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인육을 먹은 이유는 "인간이길 포기하려고."라고 밝혀 모두를 공포에 떨게했다...

그러나 끔찍한 범행을 자행하면서도 양수리 부근에서 이종원 씨와 함께 납치된 이 모 씨를 유일하게 살려주며 탈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일부러 탈출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지, 단순히 이 씨를 너무 믿어서 방심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체포된 후 진술이나 구치소에 수감된 후 김현양에게 면회를 와 '날 일부러 살려준 거냐' 고 묻던 이 씨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르면 일부러 기회를 준 것이라는 뉘앙스는 아니었으나 신고한 이 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문상록

검거 당시 나이 23세,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특수절도 등 전과 3범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가계를 책임지고 있던 친형과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강동은과 함께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생활기록부에 "학습에 흥미가 없고 우발적 행위가 우려되며 자기 억제를 못함."이라는 지적이 있다. 평소 충동 조절 장애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였다.

1991년 입대했지만 같은 해 12월에 의가사 제대를 한 후술집 웨이터같은 잡일을 하다가 강동은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특수절도로 감옥에 있을 때 김기환과 인연을 맺었으며 출소후 조직에 가담해 첫 피해자였던 최미자씨 살해를 제외하곤 모든 범행에 참여했다.조직내에선 조직의 부두목이었던 강동은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김기환 다음으로 연장자였지만 서열은 강동은, 김현양 아래였기 때문에 범죄 행위시 그다지 주도적인 역할은 맡지 못했으나 김현양이나 김기환 못지 않은 잔인한 성향의 소유자로, 범행시 살인 행위 자체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기환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였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 모 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못하고 굉장히 못마땅해 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던 조직행동강령을 어기며 이 씨를 살려주려 한 김현양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고 주먹다툼까지 벌였다.

강문섭

검거 당시 나이 20세,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맨 나중에 합류한 막내 조직원이고 유일하게 전과가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 밑에서 자랐다. 양쪽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이 때문인지 학창시절 늘 우울하고 무기력했으며 주의가 산만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한 후,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술집 웨이터 일 등을 하다가 알게 된 문상록의 소개로 강동은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거금을 쥐어주겠다.'던 김기환의 말에 현혹되어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검거 후 범행 동기가 '자신의 얼굴에 난 화상흉터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 자금 마련' 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조직 내에선 백병옥과 함께 서열 최하위로 범행에 있어서 주도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주로 뒷처리를 담당했다.

백병옥

검거 당시 나이 20세, 특수강도 등 2범. 다른 지존파 조직원과는 달리 부모 양쪽이 온전하게 있었으며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도 아니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가 품팔이를 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지존파에 가입해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라고 밝혔다.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초등학교 재학 중 장기 결석으로 이미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해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절도 전과마저 생겼다.

특수강도로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동기였던 강동은과 친분을 맺어 출소 후 강동은과 공사장에서 일한다.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중, 김기환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던 강동은으로부터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조직 가입을 권유 받아 조직의 일원이 된다. 조직 내에서 맡은 역할은 범죄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막내였기 때문에 서열은 최하위였지만 선배들 못지 않은 잔악함을 보였고 두목인 김기환에게 절대복종했다.

송봉우

이름이 송봉은으로 알려진 이유는 생전에 형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용했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나이 18세,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조직에 합류한다. 1993년 7월 초순 밤, 강동은, 백병옥 등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다가 홀로 걸어가던 최미자양을 발견하고 인근의 다리 밑으로 끌고 가 강간한 뒤 함께 있던 강동은, 백병옥도 최 양을 강간하게 된다. 그 후 최 양의 처분을 두고 강동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김기환, 김현양 등의 합류 후 살해지시를 받아 살해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의 몹쓸 욕망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꿈에 귀신이 나온다며 한동안 괴로워 하다가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내 도주하던 중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용서해주겠다며 "단합대회를 하고 개나 잡아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는 조직원들에게 속아 인근 야산으로 유인당해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김기환이 태도를 바꾸며 추궁하자 용서를 빌다가 김현양이 벽돌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한 뒤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곡괭이 등으로 폭행당해 사망, 불에 태워진 뒤 암매장 당한다...

이경숙

검거 당시 나이 23세, 강동은의 애인이자 절도 전과 1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다방을 운영하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고 모 여중 2학년을 중퇴, 가출했다. 1992년까지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광으로 내려와 어느 작은 주점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던 중 주점을 찾았던 강동은과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다. 강동은이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했으며, 인질이었던 이 씨가 탈출하자 강동은이 잡일과 요리를 해줄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주점 사장에게 진 빚 1600만원을 대신 갚아주어 풀려난 뒤 여성 조직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합류한지 이틀만에 검거되었고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98년 석방되었다. 검거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대전 둔산신도시 건설공사 막노동(노가다)으로 돈을 모은 다음,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의 한적한 농촌에 농장을 구입하여 아지트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어머니를 모신다" 고 하였다. 나중에 기자들이 이 집은 무슨 돈으로 지었는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지었다는데 사실인가? 등을 묻자 피식 웃으면서 "아냐 이거 할라고 지었지" 라고 대답했다. 이어 기자가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내 손으로 못 죽여 한이다." 라고하여 그야말로 국민들에게 충격을 선사하였다. 지하실에는 경찰서 유치장을 본뜬 철창이 달린 감옥과 화장을 하기 위한 아궁이도 만들어놓았다.

1993년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며 조직을 결성하였다. 당해 7월 충청남도 논산시 두계역(現 계룡시 계룡역) 부근에서 퇴근을 하던 23세 여성 은행원 최미자 씨를 납치하여 집단 성폭행 이후, 살인 실습이란 명목 하에 연습삼아 살해하여 암매장하였다. 첫 범죄부터 결성 이유와 어긋난 것이다. 한달 후인 1993년 8월엔 전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를 살해 후 시체를 불태워서 암매장하였다. 이유는 18세에 불과한 송봉우가 자신의 나이를 23세로 속여서 형님 대접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조직원들이 모아놓고 입금된 2천만 원 중에서 돈 3백만 원을 인출하여 달아나려는 것이 적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가 "귀신이 자주 꿈에 나타난다"며 조직 가담 회의를 느낀 것도 한몫했다.

두목 김기환이 1994년 6월 28일, 학교 선배의 집에서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서 선배의 조카를 강간하다가 들켜 강간치사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당황한 조직원들은 우왕좌왕하다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삼은 뒤 모든 지시를 면회 중 김기환에게 받는다. 그리고 1994년 9월 8일 악사 이종원(36세) 씨를 살해한 것을 필두로 9월 15일까지 연쇄 살인을 벌이고 1994년 9월 21일 체포되었을 때까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하여 당시 현대백화점 신용판매부 직원이었던 김민경 씨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하였는데 물론 지존파가 살인극에 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넘겨 주지는 않았겠지만 개인 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주로 백화점에서 벤츠나 그랜저 등 고급차를 타고 나오는 복부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범행을 하려고 했으며 피해자들의 현금만 빼앗고 협박이나 어떠한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살인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계획했다.

어처구니없는 점은 지존자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들은 전 조직원인 송봉우를 제외하고는 상류층이나 재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였다.(물론 진짜로 금수저들을 죽였다 해도 흉악한 범죄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사실 이전에 연습삼아 살해했던 최미자 씨도 그냥 평범한 은행원이었고, 이들이 9월 8일에 살해한 이종원 씨도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밤무대 악사였으며 이종원 씨는 그랜저를 타고 이모 씨(여, 당시 26세)와 이동 중에 지존파에게 포착되어 이들이 탄 포터와 르망에 가로막혀 이모 씨와 함께 가스총에 맞아 실신해서 납치되었다.살해 이유는 단지 타고 가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서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상류층으로 착각한 것이 범행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그랜저 승용차는 무리해서 중고로 구입한 중고차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종원 씨의 그랜저는 700만원을 주고 구매한 중고차였고, 서울에 있는 밤 업소에서 새벽에 성남으로 퇴근해야 하는 이종원 씨에게 승용차는 필수품이었고, 출장이 잦다 보니 악기를 싣고 다니려면 대형 승용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이들을 납치한 지존파는 아지트에서 이 씨를 성폭행한 뒤 이종원 씨와 같이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사설 감옥인 철창에 가두었다. 지존파들은 이 씨에게 돈을 요구했으나 몸값을 받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 씨는 조직 내에서 살려 두자는 의견과 죽여야 한다는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살려 주고 살인에 가담시키기로 하였으며 이종원 씨는 살해하고 이 과정에서 이모 씨에게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지존파들은 "살려 달라"는 이씨를 가둔 뒤 시신을 희생자 이종원 씨의 차에 태워 전북 장수군 반암면 교동리까지 이동해 차를 계곡 아래까지 밀어서 떨어뜨려 완벽하게 교통사고로 위장했다. 위장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불과 4일 후인 추석 전날 9월 12일에 벌초를 하다 경기도 성남시 동서울공동묘지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한 울산삼정기계(주)의 사장이었던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는 그들의 생각대로 돈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졸부나 방탕한 상류층이 아니라 공고를 나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빚 내어 새로 공장을 인수한 성실한 사업가였다. 소씨 부부가 범행 대상이 된 이유 또한 타고 나왔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지존파가 납치해서 살려 둔 이 씨를 차에 태우고 남서울묘지를 다니다 주차되어 있던 그랜저 차량을 발견한 후 본인들의 차에서 내려 그랜저 차량을 보고 경남 넘버이며 3000cc라 돈이 많은 사람이 타는 차인 것 같다고 한 후 해당 차량의 주인을 찾았는데 위에서 벌초를 하던 소씨 부부였다.

납치 당한 소씨 부부에게는 1억원을 주면 살려서 돌려 보내 주겠다고 말을 하여 총무과장 심성수(당시나이 37세), 직원 안종환 씨에게 광산버스터미널 앞에서 돈을 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돈을 다 받았는데도 1억을 달라고 하는데 8,000만원을 줬다는 이유로 15일 새벽 3시경에 "증거인멸을 위해 할 수 없이 죽어 줘야겠다"며 그 부부를 철창 밖으로 끌어냈다. 이후 범인은 소윤오 씨에게 "고통 없이 죽어 줘야겠다"고 하여 술을 먹인 뒤 앞선 이종원 씨 살해사건의 피해자 이모 씨를 불러내 공기총을 쥐어 주며 소윤오 씨를 쏘도록 지시했다. 이에 이씨가 울부짖자 "너도 죽고 싶으냐"는 범인의 협박에 질려 결국 이씨는 엉겁결에 소씨를 쏘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범인들은 이를 보고 실신 상태에 빠진 부인까지 살해하였다.더군다나 소씨 부부는 회사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던 시기에 납치 및 살해당해서 회사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납치당했을 당시에도 지존파가 돈이 궁해서 저지른 범죄로 생각하고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서 이해한다면서 무사히 보내 주면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도 있는 상태에서 참변을 당해 그 안타까움은 더했다. 지존파는 사장 부부에게서 자그마치 8천만 원을 강탈했다. 8천만원이란 돈이 지금도 큰 돈인 건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큰 돈이었다. 1993년 당시에 쏘나타2 2.0 골드 풀옵션이 1,500만원쯤 하였는데, 2017년 기준으로 쏘나타 최고급형은 3,400만원이다. 즉 지금의 1억원대 중반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인 셈이다.

이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소씨 부부의 시신을 지하실 소각장에 넣고 태워 버렸다. 당시 범인들 중 일부는 담력을 키워야 된다는 명분으로 소씨 부부의 인육에 입을 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범인들은 검거 직후 이를 부정했다. 이들은 뺏은 자금으로 포터 냉동탑차를 비롯해 갤로퍼, 쏘나타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구입한다.

김현양은 인터뷰에서 "더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못 죽여서 한이 맺힌다. 내가 MBC 한 번 가 보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희생자 이종원씨와 드라이브를 하다 함께 납치된 카페 여종업원 이 모 씨(당시 27세)의 극적인 탈출로 인해 지존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납치되었을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감금된 후 살려달라 애원해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처음 잡혀왔을 때 김현양이 "당신이 이제부터 우리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줄 것이고 아니면 죽일 것이다."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녀는 자신들이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어이가 없어서 픽 웃어버렸는데 이런 그녀의 반응에 김현양은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양이 이씨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이 씨를 죽이려는 조직원들을 설득시키면서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목숨은 부지하게 됐으나 입막음용으로 살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은 이씨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인이었던 이종원씨, 중소기업 사장 소윤오, 박미자 씨를 죽이는 데에 동참하여 두 건의 살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두 차례의 범행 가담으로 문상록을 제외한 지존파 조직원들에게 얼추 신임을 얻었으나 그녀를 끝까지 믿지 못했던 문상록이 김현양과 심하게 갈등을 빚으며 언제든 지존파에게 희생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 씨의 탈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물건을 잘못 다뤄 손과 발에 부상을 입었던 김현양이 실밥을 풀고 상처부위에 소독을 받는 날, 이 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김현양에게 병원에 동행하게 해달라고 한다. 김현양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이 씨는 그와 동행하는 데에 성공한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김현양은 현금 50만원이 든 지갑과 휴대폰을 이 씨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간다. 이 씨는 예상보다 빨리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건 마찬가지인데 이왕 죽을 바에야 달아나서 이 사건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피해자분들에게 속죄하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는다. 지존파의 행동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해남경찰서로 가달라고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차하고 포도밭 인근의 농가에 숨어든다. 비닐하우스 안 평상 밑에 몇 시간을 숨어있던 이씨는 집주인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집주인의 지인의 차를 얻어 타 대전까지 이동한다. 그 뒤 대전 톨게이트에서 택시를 잡아 서울의 한 모텔에 도착한 뒤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연락을 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씨는 서초서에 카페 주인의 남동생과 동행하여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경찰들은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 담당을 거부한다. 분노와 공포가 극에 달한 이씨를 보던 카페 주인의 남동생은 평소 카페를 즐겨찾던 고병천 반장(당시 서초서 강력반장)에게 연락한다.

강력반장이었던 고 반장조차 이 씨의 진술이 충격적이어서 처음엔 믿지 못하였으나 이 씨가 소윤오 부부 실종, 납치사건에 대해 아는 듯한 말을 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 씨가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이 씨가 진술한 지존파의 일원 강동은의 것으로 확인되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체포작전은 수월하였다. 먼저 강동은이 포터 트럭을 타고 마을로 가다가 경찰의 미행을 눈치채고 경찰과 1.5km 추격전 끝에 검거 되었고, 김현양과 이경숙, 문상록이 강동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한 뒤 형사가 강동은의 이름을 언급하자 문상록이 도주하자 다른 형사에게 제압당하고 김현양,이경숙은 도주하려다가 20km 추격 끝에 검거 된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지트에 있다가 아지트를 급습한 경찰들에 의해 모두 검거 된다. 이 씨의 탈출 후 하루라도 이들이 빨리 아지트를 떴으면 검거되지 못했거나 검거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테지만 이씨가 탈출했음에도 아지트에 남아있던 이유는, 이씨의 탈출 성공 후 그들이 영광파출소 앞에 잠복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평소와 같아 이씨가 신고하지 않은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멀리 서울까지 달아나 신고한 이씨의 기지가 발휘된 부분이다. 또 이씨가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할 거라 믿은 것도 있다.

우순경 사건 사건

대한민국 최악의 대량 살상범 우순경 사건입니다...

한국 역사상 희대의 살인마로 전직 경찰관이다. 무려 62명을 연달아 살해한, 연쇄살인과는 다른 연속살인,대량살인마. 통칭 rampage killer들 중에서도 살인수로 어마어마한 급이다. 통칭 우순경, 그가 저지른 사건을 우순경 사건이라고도 한다.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우범곤은 어린 시절은 별다른 말썽 없이 평범하게 보냈다. 경찰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차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일하겠다고 뽐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 후부터 내성적이던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이 3년 동안 28일이나 되었으며 고교 시절에는 졸업 당시 65명 중 63등으로 열등생이 되고 말았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유리창을 깨고 그 파편으로 배를 긋는 등의 자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특히 고교 3학년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하였으며, 해병대에서 특등사수로 뽑일 정도로 사격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하였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하며, 당시 동료 순경에 따르면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져 꼭 무슨 사고를 낼 사람 같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된 것도 성격이 거칠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전출된 후에도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잔혹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2월부터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초부터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에 식을 올리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 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동네사람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21시 40분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26세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남자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총을 난사하여 장을 보러온 마을주민 3명을 살해했다.

21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으로 가서 교환원 여성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22:34)가 가능했다.

22시 그는 곧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하였고, 주민 6명을 살해했다.

22시 10분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다.

22시 50분 그는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고 말하고는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함께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총을 난사하였다. 12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다.

다음 날인 27일 5시 35분 그는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한 민가에 침입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길에서 주민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한편 의령서에서 신고를 받고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전투경찰 30명이 24:00경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 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던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서장 최재윤 경정(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01:20시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하거나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혹은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22:34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02:00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 없이 속수무책으로 끝까지 주민 살상이 진행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경찰관이 마을 주민을 묻지마 살인 수준으로 대량학살한 엄청난 사건인데도 사건발생 이틀 뒤인 4월 28일에야 중앙 일간지에 보도되었는데, 이는 당시 언론기본법상 지방에 주재기자를 두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우범곤의 약혼녀 전양도 우범곤이 쏜 총에 의해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살아났다.

그가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하여 살인을 저지르다보니, 시골사회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다. 조상대대로 친척 일족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사망하거나, 혼자 목숨을 부지한 채 나머지 가족은 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 당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가장 처음으로 살해 당한 청년과 우체국에서 살해 당한 교환원 아가씨는 미혼으로 사망한 것이 비통하게 여겨져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4월 26 - 27일 즈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 해이로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한편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 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의령서장인 최재윤을 구속하고 관계자 수명을 직위 해제시켰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가 인책사임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사퇴까지 요구했다.

여담으로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에서 재판관이었던 대법관 중 한 명이 바로 이회창이었다.

테러와는 무관한 단순 범죄이자 경찰의 흑역사라서 미디어화는 잘 되어 있지 않다.

유명 역술가 차길진은 어떻게 맨 정신인 사람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일 수 있느냐며 이것은 의령에서 죽은 빨치산 56명의 원혼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당연히 과학적 증거 따윈 없으니 흔한 미스터리 떡밥 같은 흥미로운 소리로만 흘려듣도록 하자.흥미롭지도 않다 단, 차길진의 부친이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故 차일혁 총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빨치산 운운 발언의 근원이 어디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법도 하다. 

한국 영화가 우순경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제 사건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순수했던 경찰이 시골의 작은 사회에 점차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막판에 총기난사하는 것만 같다. 대체 왜 포스터에 충격 실화라면서 과대광고를 했는지 의문일 따름. 오히려 영화는 살인자에게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고, 피해자들에게도 모종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했으니 이 영화를 실화라고 하는 것은 실제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참고로 흥행 기록은 관객 1천 명이 전부이다. 다만 개그맨의 정극 데뷔작으로서 전혀 우스운 모습이 아닌 연기가 돋보였고 원로 배우의 마지막 출연작으로의 가치가 있다.

웹툰 에피소드가 이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다. 문제는 작가가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이 사건을 거대한 정치적인 음모로 보일 수 있는 뉘앙스가 있었다. 이 사건의 생존자였던 아이가 방송국 PD가 되어 이 사건을 다시 취재하면서 당시 우범곤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거나 사실은 범인은 여러 명의 사격 전문가들이었다거나 이 사건 이후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이 되어서 대선가도에 들어서게 되어 최종적으로는 높으신 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거나, 이 사건으로 전투경찰이 생겼다거나 방송은 권력이 장악한다거나 하는 가설을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다. 오죽했으면 우범곤 사건을 5공화국 사주로 돌리는 만화 그릴 수 있으면 5.18도 북한의 사주로 일어난 거라는 만화 그려도 되는 거냐고 항의도 있었고 자신도 지역드립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이야기 자체는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와 아동학대를 경험한 주인공급의 PD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사회부조리에 눈을 뜨고 언론 자유 사수에 앞장선다는 내용인데, 거창하게 풀었던 이야기에 비해 주제의식은 좋지만 끝이 미약하였고 굳이 의문 사건도 아닌데 지나치게 음모론적으로 풀고 나갔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소재인 만큼 그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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